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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생활

서울의 문화 사적과 사라진 명소, 지하철 타고 돌아다니기

http://blog.naver.com/nimble1004?Redirect=Log&logNo=14641431

1. 문화사적
○ 서울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국보 제1호)
중구 남대문로 4가 29번지에 있다.
서울 숭례문은 한양 도성의 정문으로 남대문은 그의 속칭이다. 태조5년(1396)에 창건되었던 것이지만 현존 건물은 세종30년(1448)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성종 10년(1479)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건평 53.79평, 정면 5간(間), 측면 2간의 남대문은 현존하는 한국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우리나라 건축사상 가장 중요한 건물의 하나라 할 수 있다.

○ 서울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보물 제1호)
종로구 종로 6가 69번지에 있다.
한양 도서의 정동(正東)에 위치하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속칭 동대문으로 불리운다. 이 문루는 태조 5년(1396)에 중수(重修)되었으나, 현존건물은 고종 6년(1869)에 개축된 것이다.
화강암의 무사석(武砂石)으로 중앙부에 홍예문(虹 門)을 만들고 그 위에 중층(重層)의 문루를 세운 점 등은 서울 숭례문과 같은 수법이며 문밖으로 반월형의 옹성(甕城)을 돌린 것은 고종 6년에 개축한 것이다. 그리고 옹성 상부에는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여장에는 총안(銃眼)을 두고 있다. 조선후기 다포계(多包系) 건물의 전형적인 양식을 갖추고 있다.

○ 서울성곽 (사적 제10호)
서울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지 3년(1394)만에 조선의 수도가 되었다. 태조는 그 이듬해 궁궐과 종묘·사직을 먼저 조성한 뒤에 도성축조도감을 열어 성 쌓기에 착수하였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내다시피 했던 태조로서는 성곽이 수도방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성이라는 것은 국가의 울타리요, 강포한 것을 방어하고 민생을 보호하기 위하여 없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태조는 강조한 바 있다.
성안과 성밖을 구별하여 쌓은 한성의 성벽은 돌이나 흙으로 북악산등을 타고 낙산·동대문·남산을 거쳐서 인왕산 산등성이를 둘리는 총연장 18,1km로 쌓아졌다. 당시 서울의 총 인구가 5만명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성을 쌓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동원한 장정들의 수효는 4년간에 걸쳐 19만 7천여명에 이르렀다.
이 성에는 4대문을 두었는데, 동쪽에 흥인지문, 서쪽에 돈의문, 남쪽에 숭례문, 북쪽에 숙청문을 두었다. 그리고 4소문으로는 동북에 동소문, 동남에 광희문, 서북에 창의문, 서남에 소의문을 두었다. 조선왕조 건설의 주역이었던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기본설계가 마련된 서울의 성벽은 둘레가 40리 남짓 되고, 그 후 세종 4년(1422)과 성종 10년(1479) 등 여러번에 걸쳐 중수가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관여하게 되면서 성문과 성벽을 하나 하나 허물어 버렸다.
현재 대문 가운데 남아있는 것은 남대문과 동대문, 숙청문(1976년 복원)이며, 소문으로는 창의문과 광희문(1975년 복원), 동소문(1994년 복원)이며, 성벽으로는 삼청동, 성북동, 장충동·남산·인왕산 일대이다.

○ 광주 풍납리토성(廣州 風納里土城, 사적 제11호)
송파구 풍납동 72-1번지에 있다. 풍납리토성은 백제초기의 유적으로서 고구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던 성이다. 천호대교의 남쪽 기점에 인접해서 위치한 이 토성은 남북으로 긴 타원형의 순수한 토성이다.
1925년 대홍수 때 토성의 서쪽 벽이 유실되었으나 1973∼1978년까지 토성 일부가 복원되었다. 1966년에 토성 내 포함층의 일부가 발굴되어 선사시대 말기에서 삼국시대에 걸친 토기의 분포상태를 알게 되었다.

○ 독립문(獨立門, 사적 제32호)
서대문구 현저동 941번지에 있다.
1894∼1895년에 갑오개혁으로 조선의 내정과 제도를 개혁하였으나 당시 청나라와 일본 및 러시아 등의 간섭으로 나라의 자주독립을 유지해 나가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민중들은 국왕과 대신들을 비판하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외세의 간섭도 허락치 않겠다는 결의를 다짐하려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기왕에 서 있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 건립의 발의는 독립협회의 서재필(徐載弼)이 하였고 설계는 러시아인 [시바진]이 담당하였다. 독립문의 기공식은 1896년 11월 21일에 있었다.

○ 삼전도비(三田渡碑, 사적 제101호)
송파구 송파동 187번지에 있다.
인조 14년(1636) 청태종(淸太宗)이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하였을 때 인조는 광주(廣州)의 남한산성에서 청군과 싸웠다. 그러나 우리의 병력으로서는 청군의 위협을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인조는 마침내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청태종의 군영이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에서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나라에서 이 사실을 비석에 새겨 삼전도에 남길 것을 요구하였으므로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이 비석을 만들어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 비석의 특색은 전면에는 한자로 새기고, 뒷면에는 만주문자와 몽고문자의 이중문자로 번역해서 전면을 둘로 나누어 조각한 것으로, 한 비에 3개국의 문자가 새겨진 것으로 유일한 비석이 되었다.

○ 경복궁(景福宮, 사적 제117호)
종로구 세종로 1번지에 있다.
태조 이성계는 1394년 서울로 천도하면서 종묘(宗廟)를 짓게 한 다음 그 해 겨울에 북악산 아래에 왕궁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태조 4년(1395)에 완공하고 그 해 10월 28일 정식으로 경복궁에 들었다.
그러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은 모두 불타서 재가 된 채 270여년간이나 폐허로 되어 오직 경회루의 돌기둥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후 고종 2년(1865)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재건공사를 시작하여 2년 뒤 완공시킨 바 있다.
처음 태조의 명에 따라서 정도전(鄭道傳)이 시경(詩經)의 구절을 따서 궁 전체의 이름을 경복궁이라 지었다. 조선 최후의 왕인 순종 융희 4년(1910)에 일제에 의해 경복궁의 여러 당(堂), 각(閣), 누(樓),정(亭), 행각(行閣), 회랑(廻廊)과 기관(機關)은 모두 헐리었고, 지금은 근정전(勤政殿), 경회루(慶會樓) 외의 몇몇 전당(殿堂)과 건춘문(建春文) 및 광화문(光化門)이 남아 있다.
근정전은 경복궁 안의 정전(正殿)으로 국왕의 즉위식 또는 공식적인 대례(大禮)가 거행되던 곳이며, 경회루는 왕의 사연장(賜宴場)으로 쓰이던 곳이다.
집옥재(集玉齋)는 각국의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고,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正門)으로 이 문 좌우쪽 높은 대좌 위에는 돌로 된 해태가 놓여 있는데 이는 근세의 미술대가로 알려진 이세욱(李世旭)의 작품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경복궁을 지은 후 궁전에 자주 화재가 일어났다. 이것은 조산(朝山)인 관악산이 화산(火山)인 까닭이라 해서 관악산에 우물을 파고 구리로 만든 용을 집어넣는 한편 광화문 좌우편에 해태 한쌍을 앉혀 관악산의 화기를 막았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해태의 시선은 관악산을 향하고 있다.
건춘문(建春文)은 경복궁의 동문으로써 이 문 안에는 이전에 왕세자가 있던 전당 춘궁(春宮)이 있었다. 이 문은 오직 종신(宗臣) 즉 왕족과 궁에 봉사하는 상궁들만 드나들었다. 이와는 달리 경복궁 서편에 있던 영추문(迎秋門:지금은 없다) 안에는 승정원(承政院), 홍문관(弘文館), 규장각(奎章閣) 등 여러 관아가 있었고 따라서 이 문은 일반관리들이 사용하였다.

○ 창덕궁(昌德宮, 사적 제122호)
종로구 와룡동 2-71번지에 있다.
태조가 한양에 도읍하여 경복궁을 왕궁으로 삼고 있었으나, 정종은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였고, 태종이 즉위하자 왕 4년(1404)에 한성의 향교동에 이궁(離宮)을 짓게 하여 이듬해 5년에 완공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창덕궁이다.
이 궁에는 돈화문(敦化門)과 인정문(仁政門), 인정전(仁政殿), 선정전(宣政殿), 희정당(熙政堂), 낙선재(樂善齋), 대조전(大造殿) 등이 있고, 후원(後苑)과 같은 심오하고 아름다운 대원지(大苑池)를 가졌다. 일명 비원(秘苑)이라고도 불리어지는 창덕궁 후원에는 영화당(暎花堂), 부용정(芙蓉亭), 어수문(魚水門), 주합루(宙合樓) 등의 누각과 정자가 았다. 궁궐의 규모는 크고 화려하며 각 시대의 신구 건물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궁궐의 제도가 오늘날까지 구체적으로 남아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창덕궁을 무대로 빚어진 잊을 수 없는 정변도 적지 않다. 사육신의 참형을 비롯해서 광해군이 반정군에게 쫓겨난 것도 이 궁이었다. 그리고 영조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에 넣어 질식시킨 참변도 있엇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이 궁에서 일어났다.

○ 창경궁(昌慶宮, 사적 제123호)
종로구 와룡동 2-71번지에 있다.
조선시대 이궁(離宮)이었던 이 궁은 세종이 상왕(上王)인 태종을 편안하게 모시기 위해 즉위년(1418)에 고려시대의 수강궁(壽康宮) 옛 터에 세운 것이다. 처음 이름은 수강궁이었으나, 성종 15년(1484)에 명정전(明政殿) 등 여러 궁궐을 크게 짓고 창경궁으로 고쳤다.
정조와 순조·현종 등 많은 왕들이 이 궁에서 태어났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으로 불타서 광해군 8년(1616)에 복구하였지만 인조 즉위년(1623) 이괄의 난 때 불이 나서 수많은 전각들이 타 다시 중수되기도 하였다.
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의 정문이고 명정전(明政殿)은 법전(法殿)이었다. 통명전은 창경궁 안의 정전(正殿)이면서 대조전(大造殿)과 함께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 궁은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크게 변형되고 훼손되었으나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진행된 복원사업으로 동물원과 식물원이 과천으로 옮겨지고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 덕수궁(德壽宮, 사적 제124호)
중구 정동 1-23번지에 있다.
이 궁은 서울에 남아 잇는 궁궐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작다. 광해군이 이 행궁(行宮)에서 즉위하였고, 중화전(中和殿)과 내전(內殿)인 함녕전(咸寧殿) 등은 모두 1905년에 재건되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양식 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1909년에 준공되었다. 이 궁의 터전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였다.

○ 경희궁(慶熙宮, 사적 제271호)
종로구 신문로 2가 1-126번지 일대이다.
경희궁의 원이름은 경덕궁(慶德宮)으로 광해군 8년(1616)에 지었다. 숙종이 이 궁에서 나서 승하하였고, 경종과 정조, 헌종이 모두 이 궁에서 즉위하였으니 원래 이궁(離宮)이었던 이 곳이 한동안은 본궁과 다름없이 쓰여졌다.
광해군이 이 궁을 짓게 된 동기는 음양지리설과 깊은 관계가 다. 즉 새문동(塞門洞:돈의문 부근)에 왕기(王氣)가 있다 해서 그 왕기를 누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새문동에는 광해군의 동생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定元君)의 사삿집이 있었는데, 광해군은 바로 그곳을 빼앗아 궁궐을 지었지만 8년이 채 못되어 광해군 15년(1623)에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 종묘(宗廟, 사적 제125호)
종로구 훈정동 1-2번지에 있다.
일명 태묘(太廟)라고도 하는데, 본전(本殿)과 영녕전(永寧殿) 두 궁으로 되어 있다. 본전에는 역대 왕 중에서 공이 많은 왕의 위패를 모셨고 영녕전 즉 별묘(別廟)에는 본전에 모시지 않은 이들과 태조의 고조 4조의 신위(神位)를 모셨다.

○ 전관교(전관교:살곶이다리, 사적 제160호)
성동구 행당동 58번지에 있다.
살곶이는 영남에서 새재(鳥嶺)를 넘어 충주·이천·광주를 지나 서울에 도달하는 길목이었다. 일찌기 세종 2년(1420) 5월에 상왕이었던 태종이 이곳에 다리를 놓도록 명하여 착공하였으며 성종 16년(1483)에 완성되었다.
이 다리는 처음 성종의 명명에 의하여 제반교(濟盤橋)라 하였고, 고종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지을 때 이 다리를 헐어서 석재(石材)로 사용했으므로 지금은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어쨌든 이 다리는 장안의 금천교(禁川校), 수표교(水標橋)와 함께 유명한 다리 중의 하나였다.

○ 서울 사직단(社稷壇, 사적 제121호)
종로구 사직동 1-28번지에 있다.
한양에 도읍을 정한 태조는 경복궁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단을 배설하였다. 사직(社稷)은 국토의 신인 사(社)와 오곡(五穀)의 신인 직(稷)의 두 신위(神位)에게 제사드리는 곳으로 단을 쌓고 제사드리므로 사직단이라 하였다. 사직은 종묘와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시되어 국가의 다른 명칭으로 종사(宗社)라고 표현되었다.

○ 우정총국(郵征總局, 사적 제213호)
종로구 견지동 397번지에 있다.
이곳은 옛날 북부(北部) 전동(典洞)이었고 전의감(典醫監)이 있었던 자리이다. 고종 21년(1884) 4월, 일본과 미국 시찰에서 돌아온 홍영식(洪英植)은 고종에게 기왕부터 내려오던 역전법(驛傳法)을 고쳐 우편제도를 새로 채택할 것을 진언하였다. 이에 우정총국을 세우고 홍영식 자신은 총판(總辦)이 되었다. 우정총국은 1884년 10월 17일 밤에 있었던 갑신정변(甲申政變)의 거사장소로써 역사의 현장이다. 그러나 김옥균·홍영식·서광범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막을 내리고 만다.

○ 구 대한의원(大韓醫院) 본관(사적 제278호)
종로구 연건동 28-2번지에 있다.
지금은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 편입되어 쓰여지고 있다. 이 건물은 대한제국 칙령 제9호에 따른 의정부(議政府) 직속의 대한의원 본관으로써 일찌기 창경궁의 외원(外苑)이었던 함춘원(含春苑)의 마두봉(馬頭峰) 언덕에 세워졌다.

○ 약현성당(藥峴聖堂, 사적 제252호)
중구 중림동 149-2번지에 있다.
이 건물은 고종 24년(1887) 5월 30일 한불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세워진 성당이다. 이 성당은 중국인 기술자들에 의하여 시공되어 고종 29년(1892) 9월에 준공되었다. 이 곳에 성당을 세운 것은 천주교도 수난 때 44명의 순교자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서소문 밖에서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 구 러시아공사관(사적 제253호)
중구 정동 15-1번지에 있다.
고종 27년(1890)에 건축된 것으로 아관(俄館)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특히 고종이 1896년 2월 1일 세자(純宗)와 함께 이곳으로 옮겨 와서 이듬해 2월 20일 경운궁(慶運宮:德壽宮)으로 환궁할때까지 머물렀던 곳으로 이를 일러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하였다. 고종이 이 공관에 머물동안 친일 김홍집내각이 무너지고 친러파인 박정양내각이 조직되기도 하였다.

○ 구 벨기에영사관(사적 제254호)
관악구 남현동 1095-13번지에 있다. 원래 중구 회현동 2-78번지에 위치해 있었으나 1982년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1905년 일보인 기술자들에 의해 시공 준공되었다. 광복 후에 해군헌병대가 사용하더니 지금은 한국상업은행의 사료관으로 쓰여지고 있다.

○ 정동교회(貞洞敎會, 사적 제256호)
중구 정동 32-2번지에 있다.
개신교의 교회당으로는 국내 처음으로 지어진 것으로서 고종 23년(1896) 12월에 준공되었다.

○ 운현궁(雲峴宮, 사적 제257호)
종로구 운니동 98-50번지에 있다.
이곳은 흥선대원군의 사삿집으로써 고종이 출생해서 12살까지 살던 곳이다. 고종이 즉위한 이후 이 집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되었고,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 자신이 이 궁에서 납치당하기도 하였다 이 운현궁에는 창덕궁과 가깝게 내왕할 수 있는 임금 전용의 경근문(敬勤門)과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恭勤門)이 있었다.

○ 명동성당(明洞聖堂, 사적 제258호)
중구 명동 2가 1-8번지에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주교좌(主敎座)성당으로 종현(鐘峴)의 이름을 따서 종현성당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고종 29년(1892) 8월 5일 착공되어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 공사가 한때 중단되기도 했지만 1898년 5월 29일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설계는 프랑스 코스트(Coste)신부가 담당하였다. 명동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벽돌조 교회당이며, 국내 유일의 순수한 고딕식 구조를 갖춘 건물이다.

○ 환구단( 丘壇, 사적 제157호)
중구 소공동 87-1번지에 있다.
환구단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을 말하는 것으로 원단(圓壇)이라고도 하는데 고종 34년(1898)에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은 조선호텔의 남북쪽 정원에 황궁우(皇穹宇)란 팔각정으로 남아있지만 원래 이 자리는 세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에게 하사된 저택자리였고, 선조 때는 왕자인 의안군(義安君)의 저택자리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남별궁(南別宮)이라 불러 중국사신의 영빈시설로 사용되기도 했다.

○ 한국은행 본관(사적 제280호)
중구 남대문로 3가 110번지에 있다.
본래 이 건물은 조선에 진출했던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으로 1908년 11월 착공되었던 것으로 1910년 일제강점이 이루어짐으로써 1911년 조선은행으로 바뀌게 되고 그 다음 해에 준공을 보게 되었다. 6·25전쟁 때 내부가 불탔으나 1956년 복구되어 한국은행 본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 서울역사(驛舍, 사적 제284호)
중구 봉래동 2가 122번지에 있다.
한국에 처음 철도가 놓여진 것은 광무 3년(1899) 4월로, 일본인 회사인 경인철도합자회사가 착공했던 인천과 노량진간에 놓여진 철로였다. 지금의 서울역사는 1922년 6월에 착공되어 1925년 9월에 준공된 것이다.

○ 석촌동 백제초기적석총(石村洞 百濟初期積石塚, 사적 제243호)
송파구 석촌동 61-6번지에 있다.
석촌동(일명 돌마리) 일대는 백제시대의 돌무지무덤(積石塚)과 널무덤(土壙墓)이 많이 흩어져 있었다. 이 가운데 사적 제243호로 지정된 것은 3호·4호 돌무지무덤이다.
백제초기의 가장 왕성했던 시기의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는 피라밋 형태의 이 돌무지무덤은 바닥을 진흙으로 다지고 자갈돌을 깐 다음 그 위에 큰 널돌(板石)이나 절석(切石)을 한겹 깐 뒤 작은 돌들을 겹겹이 쌓아 네모꼴 기단을 만들어 층을 이루어 가면서 제작하는 기단식(基壇式) 돌무지무덤이다.

○ 암사동 선사주거지(岩寺洞 先史住居址, 사적 제267호)
강동구 암사동 155번지에 있다.
암사동 한강가 모래밭 언덕바지에 위치한 이 주거지는 빗살무늬토기시대인 신석기시대의 최대 집단 취락터이다. 이곳에 신석기시대의 움집들이 복원되어 있고 신석기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선사유적전시관 등이 있다.

○ 방이동 백제고분군(방이동 백제고분군, 사적 제270호)
송파구 방이동 산 47-4번지에 있다.
학계에 의하여 5세기경부터 백제말기까지의 묘제(墓制)로 밝혀진 이 고분들은 모두 구릉에 위치하였고 고구려 묘제에서 보이는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 몽촌토성(夢村土城, 사적 제297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안에 있다.
백제시대 토성인 몽촌토성은 1983년과 1984년 두 차례에 걸쳐 서울·한양·단국·숭실대 등 4개 대학교의 발굴에 의해 그 대체적인 윤곽이 밝혀져 올림픽공원에 새로이 단장되었다.
이 성은 타원형의 야산 뒤에 진흙은 쌓아서 이룩한 성벽으로서 외곽 둘레가 약 2.5km이며 성의 둘레에는 방어용 해자(垓字)시설이 되어 있다. 이 성은 이웃해 있는 풍납리토성, 아차산성과 함께 적으로부터의 보호와 방어의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던 토성이다.

○ 장충단비(奬忠壇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호)
중구 장충동 2가 197번지(장충단공원 안)에 있다.
광무 4년(1900) 남소영(南小營) 자리에다 을미사변 때 순사(殉死)한 충신, 열사(烈士)를 위해 단을 모으고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 사당(祠堂) 자리는 6·25전쟁 때까지 서남쪽에 있었다.
이 비 표면의 [奬忠壇]이란 3자는 순종이 황태자 때 쓴 글씨이며, 비 뒷면의 143자는 민영환(閔泳煥)이 썼다.

○ 봉황각(鳳凰閣,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호)
강북구 우이동 254번지에 있다.
독립운동가인 손병희(孫秉熙)가 1912년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세우고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지도자를 훈련시키려 세운 건물로, 이때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14명이며 3·1운동의 주체가 되어 구국운동의 최선봉에 섰다.

○ 낙성대(落星垈,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4호)
관악구 봉천동 산 48번지에 있다.
낙성대는 고려시대 귀주대첩의 명장 강감찬(姜邯贊)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강감찬장군이 태어날 때 별이 떨어졌다 하여 낙성대라 하였다. 서울시에서 1973∼1974년까지 이곳을 정화하면서 담장을 쌓고 사당 안국사(安國祠)를 지었다. 이곳에는 고려시대에 건립된 삼층석탑이 있으며, 탑에는 강감찬낙성대(姜邯贊落星垈)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5호)
종로구 숭인동 산 3번지에 있다.
동대문 밖 숭인동에 있는 동망봉(東望峰) 아래에는 정업원구기라고 전해지는 곳이 있다. 동망봉은 단종이 강원도 영월에서 죽음을 당한 후 그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아침 저녁으로 올라가 동쪽(영월쪽)을 바라보며 죽은 왕을 추모하였다는 곳이며, 정업원은 송씨가 단종의 명복을 빌면서 일생을 거처한 곳이라 한다.

○ 용양봉저정(龍讓鳳 亭,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6호)
동작구 본동 10-30번지에 있다.
정조 13년(1789)에 착공하여 2년 후에 완공된 건물로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묻힌 화산(華山, 현 水原) 현릉원(顯陵園)에 참배하러 다닐 때 노들강에 배다리(舟橋)를 세우고 건너가 잠시 어가(御駕)를 쉬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

○ 성제묘(聖帝廟,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7호)
중구 방산동 4-96번지에 있다.
성제묘는 관우(關羽)를 주신(主神)으로 모시는 관왕묘(關王廟) 중의 하나이다. 이 건물은 일찍이 임진왜란 이후 서울에 세워진 남묘(南廟), 동묘(東廟)가 나라에서 제사를 올리던 제도였던 것과는 달리 민간인에 의해 세워진 묘당(廟堂)이다.

○ 사육신묘(死六臣墓,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8호)
동작구 노량진동 185-2번지에 있다.
원래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6명 중 성삼문(成三門),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유응보(兪應孚)의 묘소가 있었으며, 1977·1978년의 묘역 정화공사 때 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의 가묘를 추봉하였다. 이때 단종복위운동 때 순절한 김문기(金文起)의 가묘도 마련되었다.
이들은 1455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14세 된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세조가 되자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충성심을 변치 않다가 세조 2년(1456)에 사형을 당하였다.

○ 종친부(宗親府,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9호)
종로구 화동 1번지에 있다.
조선의 역대 왕의 어보(御譜), 어진영(御眞影)을 받들어 모시는 의촉(衣 )을 만들고 종실(宗室) 제군(諸君)의 봉작(封爵), 승습(承襲), 관혼상제(冠婚喪祭) 등의 사무를 보던 곳이다.

○ 천정(天井:한우물,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0호)
금천구 시흥동 산 93번지에 있다.
시흥 동남쪽에 있는 호암산(虎巖山) 한 봉우리 위에 작은 연못 크기의 우물이 있는데 큰 우물이란 뜻으로 '한우물' 또는 '용보(龍洑)'라고 한다.

○ 지덕사 부 묘소(至德祠 附 墓所,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1호)
동작구 상도동 산 65-42번지에 있다.
태종의 장자(長子)이며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사당과 묘이다.

○ 청권사 부 묘소(淸權祠 附 墓所,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2호)
서초구 방배동 191번지에 있다.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녕대군(孝寧大君)의 사당과 묘이다.

○ 동십자각(東十字閣,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3호)
이 건물은 광화문에 연결되어 오는 경복궁 외궁성(外宮城)이 건춘문(建春門)을 향하여 꺾이는 부분에 세운 망루이다. 이와 같은 건축물은 서쪽에도 있어 서십자각(西十字閣)이라 불렀으나 일제 때 철거되었다.

○ 인조별서유기비(仁祖別墅遺基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4호)
은평구 역촌동 8-12번지에 있다.
이 비는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능양군(綾陽君)으로 있을 때 소유했던 별장터임을 기리는 기념비로서 숙종 21년(1695) 7월에 세운 것이다.

○ 선농단(先農壇,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5호)
동대문구 용두동 1158-1번지에 있다.


지하철 타고 돌아다니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3&sid2=237&oid=244&aid=0000000878&i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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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niceday915 :: 철도

http://blog.naver.com/kangchung?Redirect=Log&logNo=60047703106 :: 용왕산.

몇년 전만 해도 할아버지랑 많이 가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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